“번역은 원작을 주체적으로 읽고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
ㆍ‘번역논쟁’ 출간한 정혜용 박사
‘원문에 없는 말을 조작·날조했다. 번역을 각색 정도로 착각한 듯하다.’
‘원문에 없는 말을 조작·날조했다. 번역을 각색 정도로 착각한 듯하다.’
몇 년 전 유명 번역가에게 쏟아진 비판이다. 한국의 번역 비평 담론 중 98%가 부정적 평가를 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비평의 81%는 가독성과 충실성이 기준이라고 한다. 가독성은 의미가 통한다면 원문을 희생하더라도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역론에 가깝고, 충실성은 원문을 글자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직역론에 가깝다. 최근에 벌어진 스티브 잡스 전기의 오역 논란도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번역논쟁>(열린책들)을 내놓은 정혜용 박사(45·사진)는 이런 이분법적 논의를 거부한다. 그는 “직역이나 의역이 따로 있다기보다 최상의 번역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번역은 원어를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로 맞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번역가가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주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번역의 대상이 단어나 자구 하나하나가 아니라 ‘텍스트 전체’라는 것은 정 박사가 말하는 핵심이다. “번역자들은 작품 전체를 번역합니다. 미시적인 부분만 평가하면 받아들이기 어렵죠.”
전문번역가인 정 박사는 불문학 전공자로 프랑스에서 번역학 박사를 취득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번역의 실천·이론 양면을 경험한 셈이다. 독특한 경험의 소유자인 그는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률적 기준에서 번역을 평가하는 학계의 정량적 방식이나 ‘원서를 읽는 게 낫다’는 식의 인상평가를 모두 비판한다.
문학작품, 그중에서도 속담이나 언어유희의 번역을 보면 정 박사의 논의가 두드러진다. 그는 언어유희의 극한을 만날 수 있는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를 번역한 경험을 예로 든다.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입다’라는 동사를 쓰다가 프랑스어의 복잡한 어미변화 때문에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정 박사는 원문과는 차이가 있지만 언어유희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착복-착의-착수-착란’으로 이를 바꿔 번역한다.
속담 번역도 비슷하다. ‘곰은 잡지도 않고 가죽 먼저 팔 수는 없지’라는 프랑스 속담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의역의 입장에서는 우리 속담인 ‘김칫국부터 마신다’로 옮기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그 순간 20세기 초의 프랑스 산골이라는 배경은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의역 또한 강대국의 자국 문화중심주의 산물이죠. 낯섦 그 자체를 즐기는 것도 외국문학을 읽는 이유인데요.”
두 사례는 직역이니 의역이니 하는 평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 박사는 번역을 “원작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재창조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문학번역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문학 작품을 보고 왜 이렇게 썼어 하는 식으로 비평하지 않잖아요. 원작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확실하게 한 뒤 문학성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해야죠.” 정 박사는 “작가와 원작은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면서 번역가에게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풍토”가 문제라고 말한다. 책에 소개된 프랑스 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번역 논의는 이렇다. “번역 작품을 온전한 문학 작품으로 인정하여 그 번역 시스템을, 번역가의 글쓰기 방식을, 그의 번역관을, 번역 기획을 물으며, 번역 주체가 서 있는 번역 지평을 묻는다.” 정 박사가 ‘골방에 틀어박힌’ 번역가들의 연대를 꿈꾸는 번역·출판기획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도 그 실천의 일환이다.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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